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5
반나절 비행한 것 같았다. 매서운 찬바람은 사라지고, 아프리카의 따스한 기운이 내 날개깃에 전해오는 듯했다. 저 멀리 바다가 보였다. 이 바다는 내 마음과 달리 평온했고, 잔잔했다. 환영은 분명 아니었다.
긴 장거리 비행에 익숙한 실비아는 여기가 어딘지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호위병들에게 날갯짓으로 무언가의 신호를 보내고선, 그녀 곁에 있는 나의 손을 움켜잡았다. 우리는 갑작스럽게 급격히 하강하여 그녀에게 이끌리듯 바다처럼 보이는 물가에 외롭게 자리 잡은 섬으로 내려갔다. 어머니가 어렸을 적 가끔 내 머리맡에서 읽어주던 이 시가 이 광경과 교차됐다.
설명이 안 되는
광활한 그 땅에는
길이 없는 줄도
이제 알았습니다
길 없는 그 서늘한 땅에
이슬 묻는 풀꽃들을 헤치며
내 맨발을
조심스럽게 내립니다.
-김용택, 「사랑이라는 땅에서」
길이 없어 보이는 이곳에 내가 어떻게 용기를 내어 오게 됐는지……. 그건 아마 내가 사랑해온 모든 것을 평온하게 하려는 신비한 마력일 듯싶었다. 이 시처럼 말이다.
'설마, 여기가 왕가의 골짜기겠어?’
실비아가 먼저 푸른빛이 감도는 섬에 착지하더니, 그녀가 처음 내뱉은 말은 나의 여러 생각들을 흩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식사 호위병! 배낭을 펼쳐보게. 여기서 요기나 하고 가지. 총령님 음식은 내가 특별히 챙겼으니, 다들 편하게 먹게나.”
“네, 왕비님! 갈 길이 멀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 아니겠습니까. 허허.”
이들은 잡곡과 국수 가락을 토막 낸 것들을 게걸스럽게 먹어댔다. 이젠 그들이 먹는 음식이 하나도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실비아가 나를 위해 특별히 챙겨준 음식은 다름 아닌 사과였다. 오랜만에 먹어 보는 사과…… 입에 스르르 단물이 녹아드는…… 인간의 세계에서도 만끽했던 음식이 아닌가. 그녀의 자상한 배려가 느껴졌다. 나도 그녀를 위해 뭔가를 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수인이의 언니인 그녀가 왠지 아직은 부담스럽고 어색하기만 했다.
어느새 일교차가 심한 탓인지 섬의 따스한 기운은 사라지고, 아래턱까지 덜덜 떨릴 정도로 차디찬 어두컴컴한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호위병들은 제각기 섬의 제법 큰 나뭇가지로 날아오르더니, 숨죽이듯 거동을 멈추고는 곤히 잠 속으로 들어갔다.
실비아는 내 눈치만 살피는 듯했다. 나는 어색한 분위기가 부담스러운 나머지, 조용히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왕가의 골짜기는 아직 멀었니?”
“아…… 여기가 어딘지 모르나 보네.”
“태평양 한가운데인가? 그런데 아까까지만 해도 바닷바람이 왠지 차갑지만은 않던데.”
그녀는 내 말에 대답하기는커녕 남자처럼 호탕하게 ‘껄껄’ 웃어댔다. 나는 더욱더 궁금해져 그녀의 대답을 재촉했다.
“어디냐고? 답답하게…….”
“하하. 여긴 나일강이야. 왕가의 골짜기와는 그리 멀지 않은 아프리카…… 이집트라고.”
“아니, 벌써?”
“벌써라니? 우린 거의 반나절을 날아왔다고. 인도양은 한참 전에 지났고. 너 혹시…… 마법을 쓸 줄 아니?”
“뭐? 마법?”
난 그녀 덕분에 까맣게 잊고 있던 한스 선생님의 마법이 생각났다.
“아, 농담이야. 다른 건 아니고, 여긴 예전 고대 시대부터 마법이 감도는 곳이야. 우리가 지금 있는 이곳은 나일강 중앙에 있는 아길리카 섬인데, 오리시스가 묻힌 전설적인 곳이지. 그의 아내 이시스 신전……”
“오리시스? 이시스 신전? 알지! 역사 과목은 거의 만점이었거든. 그런데 이시스 신전은 필라에 섬에 있다고 배웠는데.”
“오! 제법인데. 음…… 그렇지만 학교 공부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야. 예전에는 필라에 섬에 있었지만……. 그래서 아마 네 말대로 이시스 신전을 지금까지 별칭으로 ‘필라에 신전’이라고도 불렸겠지만. 그 이후 필라에 섬에 있는 아스완하이댐의 건설로 이시스 신전이 수몰될 위기에 처했었는데, 극적으로 이 아길리카 섬으로 이전했어. 유네스코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생각할수록 하늘의 뜻이 기막히네. 신전을 이전할 때는 수만 명의 학자와 기술자들이 전체를 분해해서 돌 하나하나에 번호를 붙여가며 마치 퍼즐을 맞추듯 복원했다는데. 놀랍지 않니?”
“그러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전경만 봐도, 그녀의 말대로 라임빛이 감도는 마법의 신전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한스 선생님이 가르쳐 준 마법은 이 정도는 아니겠지…….
역사책 한구석의 주석이 기억났다. 카페인 음료를 중독되다시피 마셔가며, 밤새워 외웠던 기억들도 말이야.
‘어느 날 동생 세트가 왕의 자리가 탐이 났다. 그래서 그는 연회를 열어 형 오시리스를 초대해서 살해하는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벌였다.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는 솔개로 변해, 그녀의 동생 네프티스의 도움으로 생명의 입김을 불어넣어 남편 몸을 다시 소생시켰다. 그 후 이시스와 오리시스의 아들 호루스가 탄생한다. 호루스를 합법적인 파라오로 만들고…….
위대한 어머니이자 왕인 이시스. 죽음을 모르는 이시스는 이집트가 멸망해도 여전히 살아남아 헬레니즘 문명과 지중해 연안 그 너머까지 퍼져 나갔다…….
그리스도교의 부활과 성모마리아가 예수를 안고 있는 모습에서 이시스를 발견한다는데. 이집트의 여인 이시스는 세상의 눈동자. 이시스를 통해 힘든 역경을 이겨내 죽음에서 소생한 불멸의 위대함……’
“무슨 생각해. 총령.”
“아, 아니야. 이시스 신전이라고 하니까. 책 읽은 게 생각나서. 그런데 원래 이시스 신전이 있었던 필라에 섬은 여기서 좀 멀어?”
그녀는 일어서더니, 오른손을 들어 내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니, 저기 너머에 있어. 500미터쯤 떨어진 곳에.”
나는 그녀가 가리킨 쪽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섬들이 강에 이리저리 둘러싸여 있었다. 태양에 녹아들 것 같은 황금빛 모래 언덕이 눈에 들어왔다. 중앙에는 희한해 보이며 은밀하기까지 한 작은 구멍들이 있었고. 구레나룻이 긴 에머튼 선생님은 나무 윗가지에서 날 힐끔 쳐다보더니, 또 뭔가를 말해주고 싶은 게 있는지 날아 내려와 천천히 나에게 다가왔다.
“저 구멍이 궁금하시죠?”
난 에머튼 선생님에게 반말을 하는 게 아직도 어색한 나머지, 고개만 끄덕였다.
“고왕국 중왕국 시대를 거치면서 죽은 제후들과 고위 사제들의 무덤입니다. 거기에 그들의 시신들이 곤히 누워 있습죠.”
“무덤이라고? 혹시 저기에 노파 클레멘스의 무덤이? 지도도 혹시?”
옆에서 지켜보던 실비아는 내가 무척 답답했는지, 대화에 끼어들고 말았다.
“지금까지 뭘 들었어! 어젯밤에도 말했는데……. 우린 왕가의 골짜기를 가야 한다고 했잖아. 여기에서 좀 떨어진 룩소르 서쪽 강가를 가야 한다고. 아부심벨 신전을 지나면 있다고 했는데…….”
“맞아. 미안 미안해. 벌써 잊어버렸네.”
실비아는 나의 지식과 지혜가 의심스러웠는지, 얼굴에 실망감을 쉽게 드러냈다. 하지만 그건 잠시뿐이었다.
“그래, 호위병! 총령이 급한가 보군. 그만 쉬고 가자고. 별빛으로 가득한 새벽하늘도 아름답지 않은가. 왕가의 골짜기로 힘껏 날아가 보자고!”
나와 호위병들은 군말 늘어놓을 새도 없이 실비아를 따라 왕가의 골짜기로 힘껏 날아올랐다. 하지만 내 발아래에 달빛에 비친 잔잔하고 평온해 보이는 물결과 달리 내 마음은 왠지 모르게 적지 않게 요동치고 있었다. 나는 항상 큰일을 앞두고는 이례 그래 왔던 걸로 기억난다.
‘별일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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