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6
황량한 들판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곳을 가로질러 음악 소리가 흘러나왔다. 왕가의 골짜기는 바람이 부는 날이면 음악 소리가 난다는데. 천신의 소리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였다.
어느덧 동트는 태양 빛에 반사되어 저 멀리 피라미드 양식의 왕 무덤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바위를 뚫어서 만든 분묘!
“총령, 다 왔어. 여……기가 왕가의 골짜기야.”
실비아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왕조 시대 왕인 아멘호프테프 3세의 것으로 추측되는…… 좌우로 앉아 있는 멤논 거상! 그 둘이 천천히 일어나더니 거대한 돌풍과 함께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는 게 아닌가!
갑작스런 일들에 다들 놀라는 눈치였다. 알아보기 힘든 맴논의 얼굴 형체도 되살아났다. 그들의 입안에서 제각기 자이언트 지네를 한 마리씩 꾸역꾸역 내뱉어 냈다. 죽은 후에도 다시 살아난다는 왕가의 전설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무시무시한 살인적인 독침을 인간의 몸속에 뿜어내 인간의 목숨을 단숨에 앗아가 버리는 자이언트 지네!
“총령! 뭐해? 방패를 들어!”
“난 괜찮아. 실비아, 너나 조심하시죠! 호위병! 내가 아직 싸움의 전술이 미숙하니까, 누가 좀 지휘해주게!”
실비아는 내 말에 대해 거칠게 응수했다.
“자이언트 지네는 전술 따윈 통하지 않아. 방패로 독침을 막아낼 수밖에. 별도리가 없다고!”
“뭐라고? 그러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야?”
“그래도, 우린 살아남을 거야…… 아니, 살아남아야만 해!”
그녀는 잔뜩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말을 아끼는 듯했다.
그런데 자이언트 지네는 실비아와 다른 호위병들에겐 아예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날 노려왔다. 멤논의 거친 목소리가 음악의 선율에 맞춰 들려왔다.
“방․패․를․뚫․어․라!”
자이언트 지네는 또박또박 한 글자씩 내린 이 명령에 순응하듯 갈라진 혀를 길게 뻗어내더니, 내 방패를 뚫어 내 목을 향해 들어왔다. 옆에 있던 실비아와 호위병들이 소스라치게 기겁하는 듯했다. 나도 얼떨결에 단단히 잡고 있던 방패를 자이언트 지네의 머리에 내던지고 말았다.
그 순간이었다. 요즘 들어 전혀 들리지 않았던 말발굽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천신의 선한 명령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날개 달린 흰 백말이 우리 앞에 땅속을 헤집고 나타나더니 내가 던진 방패를 확 잡아 낚아채버렸다. 말 등엔 피 흘리며 고통스러워하는 늙은 여인이 앉아 있었다. 노파 같았다.
“클레멘스다!”
실비아와 호위병은 소리를 질러댔다.
‘클레멘스? 아…… 희미한 기억…… 비행기 유리창에 환영처럼 쓰인 클레멘스!’
나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그 노파는 내가 던진 방패를 자이언트 지네가 아닌 멜론 거상의 목을 향해 던졌다. 멜론의 얼굴과 몸통이 방패로 나무가 베어 나가듯 싹둑 잘라져 나갔다. 그러고는 천공 위에서 또다시 예전 제주비행처럼 클레멘스라는 단어가 붉게 물들여졌다. 놀라운 광경이었다.
그 거칠고 강한 멜론 거상과 자이언트 지네는 뭐가 그렇게도 두려운지 땅속으로 스며들더니, 땅 밖으로 두루마리처럼 말려있는 흰 천이 소가 여물을 되새김질하듯 내뱉어져 나왔다. 흰 말과 노파는 다시 그들과 함께 땅속으로 스며들어 갔다.
실비아가 낮은 비행으로 잽싸게 흰 천을 주워들고는, 그 천에 적힌 글들을 해독하려고 두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세인트 캐트리나 지하실에 지도가 있다.”
“그걸 우리 손에 넣으면, 첫 관문을…… 통과하는 거니?”
나는 잠시 안도감에 빠졌다.
실비아는 더 집중해서 두루마리에 적힌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그녀는 급작스럽게 얼굴엔 실망감이 기미처럼 잔뜩 퍼져가는 채로, 빠르게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세인트 캐트리나에 마지막, 두 번째 관문으로 가는 지도가 있다. 노파의 도움 덕분에 죽음을 면했다. …… 열정이 전혀 없는 이는 어떤 이의 도움이 있어도 죽음을 면하지 못한다. 열정이 충만한 이에게는 자이언트 지네의 입에서 독 대신 두 번째 관문의 지도를 내뿜는다.”
나도 그 글을 듣는 순간, 죽음이라는 단어가 생소하지 않게 됐다.
“미안하네. 실비아, 그리고 호위병…… 내 열정이 부족한 탓에……”
마음이 약한 나는 모든 게 미안했다.
“잠시만, 여기 맨 밑의 글에 한 시간 내에 그곳으로 가지 않으면, 지하 문이 닫힌다는데. 얼른 서두르……”
우리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 자리에서 세인트 캐트리나에 솟구쳐 날아올랐다.
그 바쁜 와중에도, 클레멘스 노파가 우리를 도와준 이유가 궁금했다. 실비아는 이 노파가 가장 믿었던 궁정의 경비대장에게 배신을 당한 아픔 때문일 거라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들을 전해줬다.
‘아, 배신의 앙갚음이라……’
나도 모르게 깊은 상념에 빠져 들어갔다.
얼마 가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저 멀리 호렙산 자락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세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았다는 그곳! 그 바로 밑에 세인트 캐트리나 수도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 하필 이곳에 병법을 찾는 지도를 보관해 뒀을까? 노파의 무덤도 있다는 말인데……”
나도 모르게 실비아에게 또 묻고 있었다.
“내 생각엔…… 전해 내려오는 말로는 병법 번역책임자 히도스 주교가 성직자였는데, 그가 번역을 잘못해서 목이 달아나는 형벌을 받았다고 해. 그때 왕과 성직자들 사이에 관계가 안 좋아져서 서로 갈등이 심해졌고. 아마 왕조차 이 수도원에 들어오지 못하게 출입을 막았던 것 같아. 몸을 불사르면서 말이야. 인간을 이길 병법 첫 장을 빼돌렸다는 이유로 히도스 주교처럼 저세상으로 간 호루스는, 아마 치외법권 식으로 된 이곳이 다른 어느 곳보다도 더 안전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어.”
그녀 나름대로의 일리 있는 설명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는 수도원 바로 옆 큰 나뭇가지에 올라 횃대 삼아 걸터앉았다. 나는 조바심에 내 디지털 손목시계에 눈이 갔다.
“실비아! 이십 분 정도 남은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됐니? 지하실이라고 했지? 호위병! 너희 둘이 먼저 앞장서게!”
“아니, 됐네! 호위병. 내가 먼저 가겠네. 내 뒤를 따라오게.”
“위험해. 총령!”
“아니야, 내 열정이 부족한 탓에 이렇게까지 온 거 아니겠어. 내가 책임져야지. 방패와 칼, 그리고 나의 열정이 날 지켜줄 거야.”
실비아와 호위병은 내 의지를 꺾을 방법을 좀처럼 찾지 못하고 있었다. 세인트 캐트리나의 마당을 거닐고 있는 수도사들 몇몇이 내 눈에 띄었다. 나는 나뭇가지를 박차고 세인트 캐트리나의 높은 장벽을 넘어섰다.
수도사들은 공중 비행해 넘어오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면포로 둘러쓴 그들의 얼굴이 내 눈에 들어왔다.
“아아악!”
수도사들의 머리와 얼굴은 없었다. 눈만 반짝이고 있을 뿐이었다. 아마도 불을 뿜어내는 왕의 포탄 공격에 대부분의 얼굴들이 불에 타버렸을 듯싶었다.
그들 중에 일곱이 나에게 손짓했다. 나는 그들을 따라 호위병, 실비아와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금빛 나는 상자가 지하실 한가운데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었다. 그러고는 그들의 몸이 물방울처럼 팍 터지더니, 물거품만 남기고 그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곳에선 마법과 마술들이 판을 치고 있다 보니, 이 같은 일들은 그리 놀라운 일에도 들지 못하는 거였다.
나는 몸을 굽혀 급히 상자를 열었다. 시간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도를 둘둘 몸으로 말은 자이언트 지네! 그게 거기에 또 있는 게 아닌가. 그 아래엔 노파 클레멘스의 것처럼 보이는 유골이 있었다!
“호위병! 날 좀 도와줘! 자이언트 지네다!”
호위병들은 급히 나에게 다가오려 하다가 악령에 사로잡혔는지, 가위눌린 듯 그 자리에서 옴짝달싹도 못했다. 실비아는 그 자리에서 눈물만 흘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자이언트 지네를 향해 칼을 들어 그것의 눈을 찌르려 했다. 그런데 운 좋게도 그 지네는 두루마리에서 몸을 풀어 유골을 품고 상자 밖으로 나오더니, 지하 속으로 몸을 감춰버렸다. 천만다행이었다.
실비아의 호위병도 전기처럼 흐르는 마비 기운이 사라지면서 숨을 헐떡이며 몰아쉬고 있는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려 했다. 그리고 이 순간을 몰입하려 했다.
“여기 두루마리가 있어. 내가 확인해 볼게.”
침묵이 흘렀다.
“상티밸리 무덤으로”
놀랍게도, 아니, 허망하게도 내가 살고 있는 그곳 상티밸리 골짜기에 인간을 이길 병법이 있던 거였다. 킴란스 기자, 모키, 심지어 교장도 그곳에 묻혀있는데 말이다.
나는 그 지도를 움켜잡아 가슴에 품었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마음이 통했는지 숨 돌릴 틈 없이 나의 고향 ‘상티밸리 골짜기’를 향해 질주해 날아올랐다. 멀리 어디론가 자취를 감췄던 새들도 우리 곁으로 날아와 함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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