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4
왕가의 골짜기로 가는 길에는 매서운 찬 맞바람이 불어오고 있었고, 옅은 석양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우리는 쉽게 남들의 눈에 띄지 않을 오렌지 빛의 망토를 겹쳐 입었다. 그리고 얼굴엔 새 부리 모양의 두건도 썼다. 누가 누구인지는 통솔 경험이 많은 실비아만이 아는 듯했다.
행여나 페나의 얼굴과 몸을 드러내고 날다가 정부의 정보 정찰기라도 우연히 마주친 날에는 불필요한 소규모의 국지전이 발생할 우려도 배제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밖에도 강하고 찬 맞바람 또한 이겨내며 날아올라야 해서 망토와 두건은 여러모로 유용해 보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따스한 공기의 유혹을 저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우리는 하늘 높이 더 솟구쳐 날아올라 가야만 했다.
“실비아, 이렇게 날아가다가 한스 선생의 공군 레이더망에라도 포착되기라도 하면 어쩌지?”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걱정 마. 조금 후에 우릴 도울 새들이 날아올 거니까. 그리고 우린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잖아. 만일…… 걸린다 해도 한스는 처음부터 우릴 간섭할 정도로 마음이 옹졸하지는 않아. 그는 결국에 가서는 우릴 더 이상 옴짝달싹 못하게 해서……”
“잠깐만…… 우릴 도울 새? 페나는 날개 달린 사람만을 말하는 거 아니니?”
그녀는 나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을 이어갔다.
“페나 중에는 새들도 있어. 이것들은 새인 엄마의 피만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거야. 나쁜 머리를 가리켜 ‘새 머리’나 한자어로 ‘조두(鳥頭)’라고 하지? 지혜라고는 전혀 없지만, 열정은 너만큼이나 강해. 당연히 배신하지도 않아. 처참하게 죽더라도 우리를 보호하고 감쌀 거야.”
“기억난다. 한스 선생이 훈련시킨 새…… 그것들도 그렇지 않나?”
“아, 한스……. 배신자 한스. 우리 새를 자기의 구미에 맞게 훈련시킨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훈련시켜도 그 새들은 우리를 공격하지는 못해. 보디가드와 비밀 첩보원 역할 정도는 할 수 있겠지. 어렸을 때부터 생긴 본능인 거야. 인간들로부터 자라난 애완 조와는 달라. 우리 새들은 어미의 품을 그리워하거든. 하지만…… 불을 뿜는 새만은 우리의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불을 뿜는 새? 혹시…… 나의 환영 속에 나타난……”
“그건……”
그녀와 말하는 사이에 정말 수백 마리의 현란한 자태를 뽐내는 새들이 우리를 감싸왔다. 더 높이 솟구쳐 올라갈수록, 이에 질세라 이것들도 더 속도감 있게 우리를 따라 날아 붙었다. 우리는 뭉게구름, 새 깃털 구름들과 한데 어우러져 있게 됐다.
“오! 학교 운동장에 맴돌던 그 새들인가?”
우리의 대화는 현란한 새들의 모습에 잠시 엇나가고 있는 듯했다.
“음…… 아니, 운동장에 맴돌던 그 새들은…… 한스가 혹독하게 훈련시킨 새야.”
“뭐라고? 설마, 그 새들이?”
나는 그 새들이 한스 선생님의 새라고 믿기는 어려워 의아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게다가 찬바람까지도 거세게 내 눈가에 부딪혀 한쪽 눈까지 찡그려졌다. 그와 중에도 실비아는 내 의중을 느꼈는지, 함께 날아오르는 호위병들 중의 하나를 이리오라고 손짓하며 부르는 듯했다.
당연히 그 호위병의 얼굴은 두건으로 가려 있는데다가, 이번에 동행할 호위병은 실비아가 알아서 차출하다 보니 그가 누구인지는 왕인 내 자신도 알기 어려웠다. 겉으로 보기엔 전쟁의 경험이 많고, 덩치도 워낙 커 보였다. 게다가 날개를 휘저어 날아가는 모습이 의젓한 걸 미뤄 짐작해 보면, 사십 대 중반의 중년 나이일 거라는 정도는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호위병은 실비아에게 가까이 날아가서 정중히 목례를 하더니, 내 옆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그 순간…… 그 호위병을…… 가람국제고에서 언제 한번 본 것 같은 그 직감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건 말도 안 될 일이었다.
‘그런데 그는…… 다름 아닌 구레나룻 선생님…… 바로 에머튼 선생님이었던 거다!’
두건으로 그의 독특한 긴 구레나룻까지 가리는 건 왠지 무리가 있어 보였다.
“선생님! 에머튼 선생님 아니세요?”
그는 두건을 벗어 얼굴을 보였다. 그러고는 바람이 몹시 매서운지 얼굴을 잔뜩 찡그려대다가 다시 두건을 쓰기에 바빴다.
“네, 총령님. 말씀을 낮추십시오.”
“아, 네……. 여긴 어떻게?”
에머튼 선생님이 언젠가 학교 교정에서 나에게 상관을 대하듯 머리를 조아릴 때, 정신병원에 가봐야 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가…… 날개 달린 사람, ‘페나’일 거라고는 꿈에서조차도 상상하지 못했다.
“학교를 잠시 휴직하고 총령님을 도우러 왔습니다. 지혜를 쌓는데 도움을 드리라는 왕비님의 특별한 분부가 있어서요. 그런데…… 총령님, 기억하십니까?”
“네, 아니, 뭐를?”
“제가 교실 창문에 걸터앉은 새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뾰족한 막대기로 갈겨 대지 않았습니까? 기억하시죠? 그 새들은 한스가 보낸 정탐꾼이었고, 날개를 숨기고 사회 생활하는 페나들과 총령님을 은밀히 감시해 가면서, 조변림 사건을 철저히 은폐시키는 역할을 담당했었죠.”
호위병 에머튼 선생님은 실비아의 말을 강하게 변호하듯 힘주어 설명해주더니, 뒤로 서서히 물러났다.
아, 이제야 베일에 가린 모든 일들의 실타래가 조금씩 풀려나갔다. 새가 부리로 쪼아 갈기갈기 찢어진 것 같은 학교 도서관의 신문들…… 굳게 닫힌 컴퓨터실 밑에 싸늘하게 죽어 있는 새, 그리고 나와 한스 선생님 단둘이 있는 캄캄한 교과 연구실 안을 노려보던 정체 모를 새…… 내가 직접 확인하지 못한 조변림 사건에 얽힌 나의 아버지와 내 친구 모키, 교장의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일들도 쉽게 풀려나갈 수 있을 듯싶었다. 지혜로운 한스 선생님의 지략은 어디까지인가? 다시 한 번 그의 지혜가 놀라울 뿐이었다.
‘그러면…… 나처럼 새가 된 하얀빛 날개의 내 엄마는 대체 뭐란 말이지? 당최 나를 아는 척도 하지 않고. 한 손에 든 지팡이는 뭐지?’
실비아는 내가 또다시 골똘히 뭔가를 고민하는 걸 발견하고는 나에게 다시 바짝 다가왔다. 지금은 그녀가 나의 유일한 고민의 탈출구였던 것이다.
“실비아……”
“좀 충격적이니?”
“그보다, 더 궁금한 게 계속 생기네.”
“……뭔데?”
“먼저…… 내 아빠, 그리고 킴란스 기자, 교장, 내 친구 모키…… 누가 죽인 거지? 네가 죽인 거라고 생각해왔는데. 조변림 사건이 밝혀지는 건, 정부뿐 아니라 페나들도 꺼려하는 거 아니겠어? 교장과 모키는 죽은 건 확실하니?”
“음, 지금 말해봤자, 넌 또 날 의심할 거야. 그리고 교장 모키는 당연히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그건…… 한스 선생의 말이 맞아. 너무 슬퍼하지 마. 그들도 다른 세계인 이계에서 그때 겪었던 일들을 후회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어. 그들의 영혼은 순수했고, 자유를 갈망했잖아. 영혼으로나마 위로해주고…… 너의 지혜로운 판단을 기대해볼게.”
내 머리가 다시 복잡해졌고, 선악이 혼동되어 왔다. 다시 제자리, 원점이었다.
“뭔지 잘 모르겠어. 그리고…… 내 엄마는 왠지 정신 나간 좀비 같다고……”
그녀는 ‘내 엄마’라는 말에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지팡이를 든 그분은…… 너의 어머니가 아니셔.”
“뭐? 그럼 엄마는 어디 계신 거야? 똑같던데. 돌아가신 거야? 누가 또 우리 엄마를!”
난 겁이 덜컥 났다. 어머니가 혹시 죽기라도 하면 난 어디에도 의지할 데 없는 영락없는 고아나 다름없었다.
“진정해. 사실은…… 네 어머니는 천상에 계시고, 처음엔 하얀빛의 날개를 갖고 있었지만, 지금은 에메랄드빛의 아름다운 날개를 갖고 계셔.”
“천상? 죽어서 가는 천국? 이제부턴 거짓 나부랭이 같은 말 했다가는 알아서 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는 여유를 보이고는 활짝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니. 전쟁이 끝나면, 너도 가볼 수 있어. 안심해.”
“네 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똑바로 말하라고! 죽은 건 아니지?”
“당연하지.”
“그러면, 엄마를 닮은 그 늙은 아줌마는 누구야?”
“……우리는 네 어머니를 페나로 만들려는 생각은 없었어. 그런데 우리 페나 중에 네 엄마를 닮은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리고 우리와 그녀는 아주 가까운 사이였고. 또 여러 조건에 맞게 얼굴의 모습을 이리저리 바꿀 수 있는 능력도 갖고 있어. 마치 살아남으려고 주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 몸의 색깔을 바꾸는 동물들처럼 말이야. 지팡이로 마법을 부리는 걸까? 놀랍지 않니? 여긴 인간들 세상처럼 반목과 시기가 심한 곳이야. 서로 이간질도 하고 말이야. 네 어머니를 하얀빛 날개를 간직한 평민 페나로 만들었다고 하면, 평민들의 반발을 줄일 수 있고 화합 수 있다는 생각에…… 네 어머니 대신 그녀를…… 미안해 미리 얘기를 해줬어야 했는데…….”
“아니야. 됐어. 인간들의 세계처럼 이곳도 정치적이군. 아무튼 네 말이 진심이었으면 좋겠어.”
나는 어머니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흡족했고, 행복했다. 호위병들, 실비아와 함께 모진 찬바람을 받으며 왕가의 골짜기로 더 높이 솟구쳐 날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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