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6
초저녁 7시 15분.
“가온, 나야.”
낯익은 목소리였다.
“누구지?”
“벌써 날 잊었어?”
“혹시, 수인이?”
“응, 조용히…….”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는 여기서 얼마나 고민이 많았을까? 그녀의 활기찬 음성을 어디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지 않은가.
설마 마음 약한 수인이가 나의 아버지를 죽였을 리가……. 나는 그녀만 생각하면 심장이 멈출 것 같고 피가 거꾸로 솟을 것만 같았다. 그 안에는 연민의 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죽이기라도 했다면……. 그 배신감은 영영 치유될 수 없을 것이다. 나의 내부에서 상상의 배신감과 연민의 정이 강하게 맞부딪히고 있었다.
그와 중에 그녀는 비밀스럽게 발뒤꿈치를 들고 나에게 다가왔다.
“아, 수인아!”
나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반갑게 맞이하려 했다. 연민의 정이 상상의 배신감을 억누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나를 보자마자, 두세 페이지 분량의 문서를 내보이기에 바빴다.
“이 문서를 꼭 봐야 해, 알았지? 나, 간다.”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비밀스럽게 속삭이고는, 빠르게 몸을 낮춰 문밖으로 나가더니, 날 힐긋 쳐다봤다.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그녀는 말할 틈도 주지 않은 채, 총령실 바닥으로 두꺼워 보이는 책문서 한 묶음을 미끄러지듯 던져주고, 왔다간 흔적조차 남김없이 사라졌다.
나는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로 동그랗게 떴던 놀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리고 긴장도 풀렸는지 나의 배 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그녀가 나가면서 한스 선생님처럼 조언하는 몇 마디 말을 던져 준 것 같은데, 그건 너무 작아서 들리지 않았다. 늦은 시간도 아닌데, 어떻게 총령실 주위의 살벌한 경계를 뚫고 들어왔는지는 궁금하지가 않았다. 이 궁전에도 분명 그녀만의 편이 있을 것만 같았다. 실비아가 그녀의 언니인데도 궁전에서는 공과 사가 엄격했고, 왕족과 평민이 있는 걸 보면 서로 시기하고 반목하는 계파도 있어 보였다.
‘혹시…… 실비아와 수인이는 이복자매가 아닐까? 날개 색도 다른 걸 보면…….’
나는 여러 생각들이 교차되어 좌우로 머리를 흔들어 억지로라도 근거 없는 생각들을 지우려 했다. 수인이를 한동안 불신한 것에 대해서도……. 현실을 직시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날 만날 때마다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내 가슴에 십자가 표시를 해주곤 했는데……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과거를 벌써 잊은 건가. 또 다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을 떠 그녀가 비밀스럽게 전해준 문서에 집중했다.
그녀가 던져 준 문서는…… 바로 한스 선생님이 아끼던 ‘크리스 왕국’의 요약판이 아닌가. 그가 말해줬던 그 비밀문서가 분명한 듯했다. 그 당시 상세히 알아서는 안 되는 극비문서!
‘수인이가 이걸 어떻게 얻었지? 그리고 그걸 얻어 뭘 어쩌자는 거야.’
나는 탐구심을 억제하고 흥분도 가라앉히면서, 반신반의하며 겉표지를 열었다. 어김없이 수인이가 남긴 쪽지가 있었다. 예전부터 그녀에겐 나와의 소통의 도구로 쪽지 말고는 없었다.
‘75페이지를 읽으렴.’
그녀답게 인정머리 없을 정도로 짤막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페이지를 넘겼다.
내 눈동자는 75페이지를 한 번에 읽어내려고 이리저리 구르고 있었다.
“……날개는 은밀한 여자의 성기, 마약 등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타고난 능력을 뜻하기도 한다. 남들보다 태어날 때부터 여러 가지 재능이나 혜택을 갖고 있다는 것…….”
‘뭔 말이야. 쓸데없는 말들 아니야. 내가 알고 싶은 게 아니라고.’
나는 극도로 흥분되어 불필요한 글들만을 모아 따로 찢어버리고 싶었다. 스스로를 진정시켜야만 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시 읽어 내려갔다.
“문명이 탄생되기 이전, 크리스 왕국시대…….”
바로 이거야! 내가 찾는 바로 그 내용이었다. 요즘 들어 나의 감정 기복이 심하다 보니, 내 성격 말고는 탓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 시대에는 날개가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먼 거리를 여행했으며, 늘 공격적이었다. 마침내 인간 세계도 지배하기를 원했다.”
‘허무맹랑한 이야기네. 새가 인간을 지배하겠다는 식이네?’
나는 어느 누구를 억압하는 걸 싫어하는 새의 관점이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래도 수인이가 읽어 보라고 준 이유는 분명히 있을 듯싶었다. 그녀는 매사 진지했으니까. 나는 글자 하나하나 읽어 내려갔다.
“에메랄드빛의 날개를 갖고 있는 큰 새는 아름다움을 소유했다. 인간들의 왕까지 아름다움으로 유혹한다면, 인간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건 완전히 실비아의 말을 뒤집어 놓았군.’
나는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었다.
“에메랄드빛 날개를 갖고 있는 새는 왕을 유혹해 아이를 갖게 되었는데, 평범한 사람, 하얀빛 날개와 에메랄드빛 날개 달린 사람들이 태어났다. 날개 달린 이들은 왕의 총애까지 받아 평범한 인간들과는 달리 힘든 노동은 하지 않았다. 이들은 편히 앉아 신선놀음하듯 자연을 벗 삼아 글쓰기에 몰입했다. 그래서 이들을 흔히 ‘페나(penna)’라고 불렀다.”
‘아, 페나? 새의 큰 깃털이나, 그 깃털로 만든 글쓰기 도구를 ‘펜(pen)’이라고도 하지!’
이제서 여러 가지 것들이 한꺼번에 정리가 됐다.
“페나 중에 에메랄드빛 날개가 달린 사람이 결국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 하지만 에메랄드빛 날개 달린 사람들과 하얀빛 날개 달린 사람들 사이에 권력 다툼으로 내분이 일어났고, 마침내 평범한 인간들에게 지배권을 물려주게 된 것이다.”
‘내분? 이건 또 뭐야!’
다음에 오는 마지막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실비아와 한스 선생님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극렬하게 설명한 글이었다. 실비아는 그에 대해 눈곱만치의 관심도 없어 보였는데……. 충격적인 글귀임에 틀림없어 보였다.
갑자기 누군가 멀리서 달려들어 내가 유심히 보고 있는 책 문서를 그 자리에서 확 구겨 버렸다.
나는 흠칫 놀랐다.
“실…비…아.”
실비아였던 거다.
그녀는 한 손으로 그 문서 원본을 꽉 움켜쥐어 구긴 채, 날 노려보는 게 아닌가. 그녀의 눈빛은 무서운 기운으로 이글거 렸다.
“가온, 아니 총령! 날 아직 못 믿는 거야! 한스 선생이 우리를 이간질하고 있는 거라고. 그는 악독하다니까!”
내 머릿속에는 이미 그 마지막 글귀가 가득 차 버렸다. 나는 그녀 앞에서 그 글귀를 기억나는 대로 소리쳤다.
“날개 달린 사람, ‘페나’가 날(한스) 유혹했다! 난 크리스 왕족 후손인데다가 지식을 갖고 있어 날 탐하려 했다!”
“실비아! 더 말할까?”
“그만, 그…그만해! 그건 아니라고.”
나는 내가 보기에도 잔혹할 정도로 그녀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춰 가며 말했다. 혹시나 내가 역적으로 몰려 갑작스럽게 달려든 그녀의 호위병에게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아서였다.
“……내(한스) 목에 부리를 박아 그녀의 독 기운을 나에게 옮기려 했다. 그 독의 성분은 자신과 비슷한 형질로 바꾸게 하는 효능을 갖고 있었다. 날(한스) 그들의 편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난 뿌리쳤다. 그리고 반항했다. 내가 갖고 있는 라이플(총)로 그녀의 눈을 멀게 했다.”
그녀는 듣다못해 한쪽 가슴을 움켜잡고 흐느껴 울었다.
호위병이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총령실로 들어오려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그녀는 들어오지 말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는 호위병 따윈 안중에도 없었고, 무작정 그녀에게 호소했다.
“에메랄드빛 날개는 무지 아름답지! 너희들은 아름다움 이상으로 너무 많은 것을 탐하다가 불행해진 거야. 광적으로 변하고 있는 거라고. 너, 아니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건가?”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뭔가 변명의 말이라도 해야 하는 데 말이다. 그녀가 마치 한스 선생님의 말들을 다 인정하는 것 같아 나를 무지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내 어깨 위에 아름답게 보였던 에메랄드빛 날개를 칼로 싹둑 잘라 버리고 싶을 정도다. 그래도 난 진정하려고 애썼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그녀 또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억지로 말을 이어 가는 듯했다.
“가온, 하지만… 난 한스 선생을 유혹한 적은 없어. 단지……”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난 그녀가 핑곗거리를 찾으려는 듯한 모습이 진실 되어 보이지 않아 감정이 더 복받쳐 올랐다. 무의식적으로 그녀가 구긴 문서 원본의 겉표지를 찾았다. 이미 그 문서 원본은 바닥에 내동댕이쳐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반감을 드러내듯 몸을 구부려 그걸 주워 올려, 그 표지에 열거된 조그마한 글들을 읽어 내려갔다.
“선과 악은 쉽게 나눠지지 않는다. 이것을 구분하며 싸울 때 역사는 전쟁으로 매듭을 졌다. 하늘은 태어날 때 여러 가지를 한꺼번에 주지 않는다. 아름다움, 지혜, 지식, 열정, 부유함……. 이 모든 것을 가지려 할 때 불행이 찾아온다.”
…
존 샤인트 K(크리스) 한스.”
그녀는 소리쳤다.
“그의 말은 사탕발림일 뿐이야! 한스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탐욕이 엄청나다고. 미국의 워싱턴의 정가와 재계와도 손잡았단 말이야! 그 때문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이들로부터 값비싼 군수물자나 무기 등을 사들일 수밖에 없다고.”
나는 이 같은 그녀의 말에 대한 지식이 없어 뭐라고 응할 말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워싱턴 정가’라는 말에 단지 펜실베이니아 애비뉴에서 떼죽음 당한 불쌍한 새들이 떠오를 뿐이었다. 그녀의 말 다음에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몰랐던 것이다.
나는 그저 생각나는 대로 그녀의 말들을 모두 부정하고 싶었다.
“왕의 사랑을 한몸에 받은 페나!”
“뭐? 너, 총령! 뭐라고 했어?”
“페나! 너희들은 귀족이 아닌가? 일도 안 하고, 하릴없이 수학 방정식이나 연구하고, 때론 한가롭게 글이나 창작하며 지금의 우리를 괴롭히는 귀족 같은 너희들!”
“음…… 이것만 말해주지. 페나는 그런 뜻이 아니야. 절대 아니라고. 왕의 사랑? 웃기는군. 받기는 했지. 하지만 타고날 때부터 우리 페나는 날개도 있는데다가 능력도 많아서 오히려 왕의 주변 인물들에게 억눌려 살았어. 날개 달린 크리스 왕자가 국외로 쫓겨나는 신세도 됐다고. 왕권을 노린다는 오해로 말이야. 심지어는 형제들한테 고문도 당하고, 변사체로 강가에 버려지기도 했지. 결국 우린 날개를 옷 속에 감추고 살 수밖에 없었단 말이야! 그래서 그 고통스럽고 힘든 마음들을 글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고! 그 마음을 네가 알아? ‘펜(pen)’이란 말에는 귀족들이 즐겨 쓰는 ‘깃털 달린 펜’ 말고도 ‘우리 안에 가두다(penn)’, ‘감정과 분노 따위를 억제하다’는 뜻이 녹아있다는 걸 넌 알아야 한다고!”
그녀가 시큰둥한 내 표정을 읽고는 체념하듯 또 말을 던졌다.
“그래, 네가 원하는 말들을 해볼까? 난 다른 것들도 갖고 싶었어. 그게 나의 가치였던 거야. 아니, 우리 페나의 바램이었던 거야. 그렇지 않았다면, 우린 날개 짓만 하다가 죽게 되는 운명이었던 거라고. 남들이 보기에는 아름다울지는 모르지만. 그것만으로는 공허해. 너도 너만의 가치를 지키고 싶지 않니?”
“그게 말이나 돼! 이제서 네 정체를 드러내는군. 나무는 나무대로, 새는 새 나름대로, 그 자체의 의미가 있는 거라고. 그게 사실 아니겠어?”
나는 그녀의 궤변을 고함을 질러가며, 철학적으로 응수하려 했다.
“아무튼 이젠 너도 에메랄드빛 날개를 달고 있어. 너도 새라고!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갈 수 없는 새! 너도 우리처럼 날개를 숨기고 살 수밖에 없는 신세가 된 거라고. 인간들의 관점으로 쓰인 크리스 왕국의 문서엔 진실이 없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고! 이 바보야. 그리고 ‘사실’이란 말…… 그거 정말 중요하지. 하지만 우린 현실 속에서 살고 있어. 사실이 정말 뭔지 알려면, 몇 백 년 몇 천 년이 걸릴지도 몰라. 역사 사료를 지배층들이 얼마나 왜곡을 해댔는지 알아! 이런 단순한 진리도 모르니?”
그녀는 쉴 새 없이 말을 이어갔다.
“또 문명과 문화도 모르는 새가 탐욕 때문에 인간을 먼저 유혹했다는 게 말이 되냐고. 개가 사람 보면 꼬리를 흔들어 대는 게, 사람을 유혹하는 거로 보이니, 본능일 뿐이잖아! 이렇게 말해야 내 말을 조금이나마 믿을 수 있겠어?”
나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다. 혼란스러운 내 머리를 깨부수고 싶을 정도로, 또 아파왔다. 내 자신의 운명의 닻을 과거로 돌이키고 싶을 뿐이었다.
하지만…… 살려면, 아니 살고 싶다면, 그녀 말대로 지금 나의 현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녀의 생각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고, 확고했다.
결국 나도 지금은 그녀의 말대로 인간이 아닌 어쩔 수 없는 ‘새’였던 것이다. 날개 달린 ‘페나’인 것이다. 나는 내 처지를 한탄하듯 천공을 향해 울부짖었다.
그나저나 실비아와 수인이는 서로를 감싸며 인정하는 척 보이다가도 주인과 노예처럼 언제부터, 아니 언제까지 이렇게 서로 등지고 있어야만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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