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4
후덥지근한 밤공기도 어느덧 사라지고, 찬바람이 거세지면서, 장롱 깊숙한 곳에 차곡차곡 쌓아놓은 솜이불을 꺼내게 됐다. 그즈음 어김없이 대학 입학시험 날이 다가왔고, 마침내 한스 선생님이 주도면밀하게 지도한 졸업반 선배들이 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였다. 시험 성적 평균이 전국 5위권에 드는 쾌거를 이루고 말았다. 명문대 입학생도 당연히 꽤 늘어났다. 그의 지도력 덕분이라는 소문이 교내엔 파다했다.
그는 무지 바빠졌다. 그의 교과 연구실의 전화벨이 끈질기게 울려댔고, 그에 대한 한 꼭지의 인터뷰 기사라도 내려고 연구실 앞에 목 빼고 기다리는 기자들로 미어터져 왔다. 전국 각지의 신문방송 통신사들이 이렇게나마 앞 다퉈 그의 신화를 보도하느라 한동안 난리법석이었다. 그는 영웅이 되어 가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그가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게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수인이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에겐 우울함과 슬픔이 한꺼번에 엄습해왔다. 이러다가는 그녀를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스 선생님과 내 운명은 왜 이리도 다른 걸까.
수인이는 조변림 사건의 희생양일까? 아니면, 그녀의 아버지처럼 몹쓸 병에 걸려 병원에 입원해 있는 걸까? 만일 그것도 아니면……. 나는 이 같은 비밀의 장막을 빨리 걷어내고 싶어 안달이 날 정도였다.
‘조변림 사건을 알게 되면, 죽게 된다.’는 한스 선생님의 말만 믿고, 더 이상 가만히 넋 놓고 앉아 있을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했다. 예비 고3이 된 나는 겨울방학 때에도 학교에 나가 보충수업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참에 먼저 학교 교무실에 가서 그녀가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를 직접 내 귀와 눈으로 확인하는 게 나을 듯싶었다. 하나같이 선생님들이 ‘그녀에 대해 왜 물어 보는 거지?’라고 반문할 듯싶었다. 하지만 이 같은 우려들은 걱정 축에도 들지 못했다. 학교 행정에 무지한 나로서는 어느 선생님에게 이를 물어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쉬는 시간에 담임선생님에게 직접 물어 보는 수밖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어 보였다.
★
담임은 점심 후 테니스장에 있는 벤치에 홀로 앉아 커피를 마시곤 했다. 겨울방학 보충 때도 그러했다. 그는 보기만 해도 엄청 써 보이는 진한 검은 색 블랙커피를 즐겨했고, 왠지 외로워 보였다.
급기야 그가 건망증이 몹시 심하다는 소문은 예전부터 교내엔 파다했었다. 그는 은행에서 주택 전세 자금 용도로 거액의 돈을 인출해서 분명 어딘가에 잘 보관해 놓았다는데……. 하지만 그 돈을 어디에 놓았는지 3년이 지난 지금도 까맣게 잊어먹었다는 거다. 그런 일이 여러 번 반복하다가 지금은 이혼까지 겪게 되었단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점심때 테니스장 벤치에 앉아 진한 블랙커피를 마시는 게 하루 중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수업 중에 늘 말해 오곤 했다.
‘그래, 테니스장으로 가자.’
나는 얼른 점심을 먹는 둥 마는 둥하고, 테니스장으로 달려가 그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테니스장에는 이 추운 겨울방학 때에도 점심시간을 활용해 테니스 연습을 하는 선생님들이 쉽게 목격됐다. 담임은 예상했던 대로 한 손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들고 있었고, 고드름이 처마 밑에 얼 정도로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는데도 단추가 없는 가벼운 하늘색 긴팔 티셔츠에 블루진 차림으로 천천히 걸어오고 있었다. 그에겐 아직 초가을인 듯싶었다. 그래도 그는 중년의 나이가 넘었는지 허리와 엉덩이가 쳐져 보이는 건, 감추질 못했다.
그는 테니스장 벤치에 멀거니 서 있는 나를 보더니, 먼저 손을 흔들어 주는 여유를 보였다.
“가온군!”
“네, 안녕하세요.”
나는 멀찌감치 걸어오고 있는 담임에게 일상적인 인사를 했다. 그는 나에게 가까이 오더니, 내 등을 두드려 줬다. 그러고는 벤치에 털썩 앉았다. 차가운 기운이 맴돌았고, 푹신한 가죽 방석을 갖고 있는 벤치는 아니지만, 허리를 쭉 펼 수 있도록 나무 등받이가 있었다. 오랫동안 앉아 있어도 허리에 큰 무리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내가 그를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모르는 눈치였다.
그는 날 보더니만, 나에게 먼저 건넨 말은 무엇보다 나의 성적에 관한 것이었다.
“가온군, 요즘 학교 성적이 많이 떨어지고 있네. 조류학으로 유명한 한국국립대학의 진학 꿈을 벌써 잊은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요…….”
그와 나는 한 자리에서 서로 다른 꿈을 꾸듯, 동문서답을 하고 있었다.
“네 아버지처럼 너도 한국국립대학에 가야지.”
그는 더 이상 김이 나지 않은 진한 블랙커피를 달콤한 시럽을 먹듯 한 모금 들이마시면서 말했다. 나는 학업 성적 때문에 그를 만나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나에게 관심을 가져 준 그에게서 진정한 따뜻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런데요, 선생님…… 저……”
머뭇거리는 나의 모습에 그는 말을 이어갔다.
“걱정 말게, 한스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부임해 온 이후로 학업 분위기도 좋아졌고, 너도 노력하면 한국국립대학에 갈 수 있을 거야.”
그는 나에게 억지로라도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려고 계속 말을 이어 가려 했다.
“한스 선생님도 한국국립대학에서 조류학을 전공한 수재였어.”
“네?”
나는 순간 깜짝 놀라고 말았다.
“선생님, 뭐라고 하셨죠? 한스… 선생님이 아버지와 같은 한국국립대학에서 조류학을 공부하셨다고요?”
나는 문득 그가 아버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말한 것이다.
그의 이력에는 ‘국내 명문대학 졸업’이라고 추상적으로 씌어 있을 뿐이었다. 단지 고생물학과 국제정치학 박사를 취득한 ‘프린스턴’이라는 낯설지 않은 미국 대학원 이름만 적혀 있었다. 어느 대학 출신인지는 알 수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담임은 내 질문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말하다가 뭔가를 잊고 왔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가온군, 공부 열심히 하고…….”
그는 내 물음도 잊은 채, 황급히 당부 말만 하고 매점에 지갑을 놓고 온 것 같다며, 급히 일어났다. 건망증이 도진 것 같았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도 그에게 다급히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저…… 선생님, 저랑 같은 2학년 학생 중에 ‘천수인’에 대한 소식을 알 수 있을까요?”
그는 내 말을 듣고는 가던 발걸음을 멈췄다. 그는 뒤돌아보며, 눈을 휘둥그레 크게 뜨더니 나를 쏘아보듯이 바라봤다. 흥분한 것 같았다.
“네가 수인이를 어떻게 알지? 같은 학년이라서 아나?”
그는 나에게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말을 이어갔다.
“그 학생…… 언니 실비아랑 몇 달째 무단결석을 하고 있어! 연락이 전혀 안 된다고. 학교에선 경찰에 신고한 상태야. 넌 실비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나?”
‘실비아가 수인이의 언니라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그 순간 깊은 생각에 잠기고 말았다.
‘나를 짝사랑하는 실비아…… 혹시 선생님은 내가 그녀를 알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물어본 것 같아.’
나는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 이 같은 잡념들을 던져버리려 했다.
“저……”
나는 그의 말에 대답을 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나의 대답을 기다릴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지금 무지 바쁘거든.”
그는 지갑에 집착됐는지 바쁜 걸음으로 매점을 향했다.
‘아……. 이럴 수가!’
나는 그 자리에서 더 이상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여러 온갖 상념들이 나를 벤치 위에 옴짝달싹 못하게 붙잡아 버렸다. 마녀의 손아귀에 붙잡힌 것처럼 말이다.
예로부터 현자들이 말해온 것처럼,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과 숨겨 있는 것들은 너무나도 달랐다. 삶이라는 게 다 그렇겠지만. 한스 선생님이 아버지와 같은 한국국립대학 조류학과 출신이고, 수인이의 언니가 실비아라니……. 수인이의 말을 빌리자면, 실비아는 친언니가 아니었다. 그래도 그렇지. 실비아가 날 짝사랑한다는 소문이 학교에 파다한데……. 무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 실비아의 성도 ‘천’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천수인의 배다른 자매 언니 실비아와 함께 무단결석이라니…… 이들의 어머니도 사라졌단 말인가?
“아, 맙소사! 머리 아파!”
나도 모르게 괴성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내 머릿속이 실타래로 이리저리 엉켜버리는 듯하더니,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들도 교장처럼 조변림 사건을 알고 죽게 되었을까? 한스 선생님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이젠 도저히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에게 직접 묻는 것보다…… 이를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이 물밀 듯이 몰려왔다.
아침 햇살 알알이 담은
거미줄의 이슬부채에 화들짝 놀라
하루를 살아야 한다
가장 작은 너 자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바위의 슬픔으로
풀의 기쁨으로
하루하루를 노래해야 한다
고은시집 <내 변방은 어디 갔나 - 그래도 다시 태어나야 한다>
‘내가 즐겨 읽었던 이 시처럼…… 다시 시작해보는 거야.
그래…… 조변림 사건!’
신데렐라…… 그리고 워싱턴 정가 이야기에 대한 궁금함은 뒤로 미루더라도…… 이게 뭔지 알아낼 수밖에 없었던 거였다.
신문 방송사들이 차단시킬 수밖에 없었던 조변림 사건 기사들. 이걸 해킹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다가 감옥이라도 가게 되면……. 그 이후는 생각하지 않으련다.
★
문득 중학교만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에는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해킹의 천재 ‘모키’가 떠올랐다. 그는 말할 때마다 세상만사 모든 게 불만 불평이었는지, 모기처럼 톡톡 쏘듯이 말한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래도 그는 나한테만큼은 부드럽게 대해줬다.
아마 내가 누구보다도 더 불쌍해 보여서……. 그 이유가 어떻든 간에 모키는 나의 절친한 친구였다.
모키는 컴퓨터로 정보 해킹만 잘해도 대학 나온 것만큼의 좋은 대우를 받을 수 있다고 의시되곤 했다. 그는 평소 집과 컴퓨터 교육원만을 ‘왔다 갔다’ 하면서 해킹전문가의 꿈을 키워왔던 것이다.
‘한번 모키를 믿어볼까? 좋아, 이 친구의 능력을 믿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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