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6
‘대부분의 학생들이 학교를 빠져나가는 때가…… 아마도 한산하고 어둑한 늦은 밤쯤이 될 거야. 한스 선생님은 그때 쥐도 새도 모르게 그 문서들을 불사를 게 분명해!’
아무리 빨라도 귀뚜라미 여러 마리가 요란스럽게 울어대는 오늘 밤 10시가 넘어가면, 대부분의 비밀문서들이 시커먼 잿더미가 될 듯싶었다. 늦게까지 이어지는 졸업반 학생들의 야간 자율학습이 그때 끝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장도 뭔지 알 수 없는 여러 우려되는 문제들의 씨앗을 가급적이면 빨리 싹둑 자르고 싶을 테니까. 그는 한스 선생님에게 오늘 당장 문서들을 불사르라고 간곡하게 권유 아닌 강요를 했을 게 뻔했다. 여하튼 밤 10시, 그 이전엔 한스 선생님을 만나러 가야만 했던 것이다. 갑자기 나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면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고 떨려왔다. 당연히 두려움까지 엄습해와 왠지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요즘 들어 어두운 그림자가 얼굴에 가득 드리워진 수인이를 모른 척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거기에다가 내 방 창가에서 줄곧 날 감시한 그 정체 모를 사람만큼 큰 새에 대한 궁금증을 더 이상 참을 수도 없었다. 지금 당장 결심을 해야만 했다.
꼭 꼬집어 뭐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이 같은 여러 가지 정황들이 나를 한스 선생님에게 인도하고 있던 거였다. 나에겐 이런 운명과도 같은 일들을 깔끔하게 추진할 무덤덤한 용기가 필요했다.
내 방의 벽시계 바늘은 아직도 부활의 꿈을 잊은 채 11시 10분대를 가리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많이 피곤했는지 벽시계 배터리 정도 바꿀 여력도 없었던 건가. 나는 빠끔히 내 방문 밖으로 목을 빼고 거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머니는 군데군데 찢겨진 초콜릿 빛깔의 인조가죽 소파 위에 힘없이 누워있는 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눈여겨보니 그녀는 텔레비전 리모컨을 손에 비스듬히 쥔 채, 코까지 골아가며 곤하게 자고 있었다. 심지어 목까지 가리는 답답한 터틀넥도 벗지 않고는…….
‘불쌍한 나의 엄마……’
나는 그녀의 손에 쥔 리모컨을 조심스럽게 빼어 들고는 소리가 될 수 있으면 나지 않도록 줄여가며 텔레비전을 켰다. 다행이었다. 텔레비전 디지털시계가 정각 저녁 9시를 표시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현장의 취재기자가 아닌 건장한 아나운서의 비통한 목소리가 뉴스 헤드라인을 타고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이건 또 뭐야?’
미국 아칸소주가 아닌 낯설지 않은 워싱턴 펜실베이니아 에비뉴……. 이곳에서 무려 1만여 마리의 새들이 뱃속 내장까지 드러내 보인 채로 길바닥에 죽어 있는 장면이 고스란히 텔레비전 영상에 담겨 있었다. 간편하고 스포티한 갈색 티셔츠와 청바지 차림의 기자도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를 더 이상 감추지 못했다.
단순히 새떼의 무참한 죽음을 기상 이변만으로 판단하기는 너무 기이했다. 새들의 처참한 죽음이 나의 눈시울을 적셔왔다.
‘다음엔 또 어딜까? 유럽? 아니 우리 집 앞마당에서? 아니면 학교? ‘펜실베이니아’라면 국회의사당과 백악관 비지터 센터가 있는 미국의 정치문화 중심지라서 가끔은 워싱턴 정가라는 의미도 있다고 에머튼 선생님이 말하곤 했는데…… 심지어 뉴스와 저널리즘에 대한 주제를 전시하는 ‘뉴지엄’ 박물관도 있고. 교장이 말한 워싱턴 정가가 이런 의미인가?’
말 그대로 이런 추측들은 나만의 근거 없는 생각의 파편 정도에 불과했다. 조변림 사건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인 것 같았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생각의 꼬리 물기가 시간을 지체시키고 있었다. 난 서둘러야만 했다. 밤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공부하는 같은 반 친구들도 있어서 이들과 어색하게 만나는 것은 괜히 일들만 복잡하게 만들 뿐일 거다. 심지어 동료들이 이런 일들에 끼어들기라도 하면, 전혀 문제 해결에 보탬이 되지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은 졸업반 선배들과 달리 한 시간 정도 일찍 끝난다. 아무리 늦어도 9시쯤에는 집에 돌아가도록 되어있었다. 나는 결국 그들이 끝나는 직후인 9시 50분에서 10시 10분 사이 교문에 들어서야겠다는 판단이 섰다.
그런데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다름 아닌 턱수염과 콧수염이 지저분하게 덥수룩하고 뚱뚱한 체구의 살벌한 눈빛을 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였다. 그는 내가 ‘고2’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가끔 내가 ‘뚱보 아저씨’, ‘털보 할아비’라고 놀리다가 그에게 자그마치 30여 분 동안 짜증이 날 정도로 혼난 적이 있다.
교장의 입김으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별 탈 없이 일하고 있는 경비 아저씨. 그는 자신을 놀린다며 날 교장에게 일렀고, 그날 교무실 구석에 쪼그려 앉아 A4용지에 반성문만 빼곡히 오십 장을 쓴 기억이 난다. 다 쓰고 나선 내 오른손이 수전증 환자처럼 하루 종일 부들부들 떨렸다. 이 일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치가 떨릴 정도였다. 조금만 대들어도 곧장 교장에게 애들처럼 쪼르르 달려가 고자질해버리는 그는, 졸업반도 아닌 ‘고2’가 그것도 밤 9시 넘어서 학교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수상히 여길 것이 분명했다. 나만의 기우일까?
다행히도 방법은 딱 하나 있었다. 비밀의 문! 그 문을 이용할 수밖에……. 비밀의 문은 우리 학교 학생들 몇 명만 아는 말 그대로 비밀스러운 문이지만, 멋지게 말해서 비밀의 문이지, 코를 찌르는 케케묵은 냄새가 나는 하수구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하수구는 다른 것과 달리 어른 두세 사람이 한꺼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을 정도로 폭이 컸다. 하수구들 중에는 신도시 개발을 하다가 홍수 등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크게 확장 공사를 해놓은 게 있었다는데. 비밀의 문이 바로 그 하수구인 것이다. 이 하수구를 통해 학교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는 경우는 대체로 너무 많이 지각할 경우에 이용해 오곤 했다.
그런데 밤 9시 넘어서 하수구에 들어갈 생각을 하니, 무시무시한 통로로 느껴졌다. 이러다가 진짜 악몽처럼 사람만한 흡혈박쥐라도 나타나든가 하면,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는 이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수인이가 뭔가를 걱정하고 있는 게 보기 싫었고, 나 또한 내 심장이 멈출 것 같은 궁금증을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그 비밀의 문을 들어갈 수밖에는.’
어머니의 말처럼 나는 연구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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