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3
나는 냉큼 문 앞에 걸려있는 두루마리 휴지를 잔뜩 빼어 들었다. 그걸로 털이 덥수룩한 내 다리와 엉덩이를 이리저리 대충 닦아냈다. 하지만 털 속의 남은 배설 찌꺼기와 냄새만큼은 지우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시간이 쉴 새 없이 흘러가고 있는 터라, 찜찜한 채로 곧장 교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늦게 들어가기라도 하면, 히스테릭한 로즌 선생님의 잔소리를 이겨낼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이러한 어설픈 나의 판단은 내 자신을 더욱더 곤욕스럽게 했다. 학급 친구들뿐 아니라, 로즌 선생님도 미처 말끔히 지우지 못한 내 몸의 똥냄새 때문에, 코를 두 손으로 쥐어 잡고 난리가 난 것이다. 다들 나보고 들어오지도 말고 똥냄새부터 지우고 오라고 소리를 버럭 질러댔다. 그 바람에, 나는 급히 되돌아서서 곧장 샤워실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이날은 똥 냄새를 지우기 위한 잔혹한 날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리듬체조 선수들이 주로 사용하는 체육관 3층 샤워실에 가서 얼마나 많이 씻었는지 내 엉덩이 살점이 벌겋게 부어오를 정도였다. 그래도 신의 축복을 기다리듯, 혹시나 내 친구 성호처럼 샤워를 갓 마친 벌거벗은 리듬체조 선수를 볼 수 있을까, 해서 빠끔히 샤워실 문틈으로 들여다봤다. 내 친구 수인이에겐 이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기랄! 멀리서 암컷 쥐새끼 한 마리만이 날 비웃기라도 하듯, 날 힐긋 쳐다보고 통통 튀기며 붉게 녹슨 환기통으로 숨어 버리는 게 전부였다.
그날은 설상가상으로 오전 내내 교실에도 들어가지 못했다. 점심때는 내가 손수 빤 젖은 옷차림으로 또다시 집에 가서 새로운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수업은 어떻게 지나갔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가 버렸다. ‘똥’과의 전쟁이라고나 할까.
오늘 이 일로 수인이에게 할 말이 참 많았다. 위로도 받고 싶었고. 하지만…… 그녀에게는 나의 마음이 전해지지 않은 듯싶었다.
어김없이 학수고대했던 방과 후가 찾아왔지만, 그녀는 나에게 다가와서 예전보다 더 어두운 얼굴을 드러냈다. 내 가방에 슬며시 쪽지를 넣어주고는 내 눈앞에서 그녀는 멀어져 갔다. …… ‘몸이 아파 에메랄드 숲은 다음에……’라고 적힌 쪽지만이 내 가방에서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그녀는 힘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발걸음을 재촉하듯, 교문 밖을 나서는 게 아닌가.
그녀가 이렇게 아픈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녀가 서서히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질 뻔했다. 나는 하루라도 그녀를 보지 않으면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
수인이는 한스 선생님이 우리 학교에 부임해오기 전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이것만은 확실했다. 어제 에메랄드 숲…… 그리고 아침 등굣길에 그의 부임 소식 등이 그녀를 한없이 우울하게 몰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그것 말고는 집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청초하고 발랄한 그녀의 예전 모습은 가뭇없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신기루처럼 아른거릴 뿐이다.
‘날개…… 죽음…… 문서…… 신데렐라…… 워싱턴 정가’
교장이 한스 선생님에게 했던 말들이 암호 코드처럼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혹시 이런 것들 때문에 수인이가 고민하는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속 좁게 그의 ‘야설 강의’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설마…….
‘아, 신데렐라? 맞아! 수인이와 친해진 것도 그녀의 벗겨진 유리 구두 때문이었지. 그때만 해도 수인이를 ‘나의 신데렐라’라고 생각했었잖아. 그리고 우리가 만날 때마다 자정 넘어 나타났던 개구리, 도마뱀, 호박…… 신데렐라 동화에서는 말, 마부, 마차로 등장하잖아!’
하지만 이런 말 같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내 자신이 무척이나 한심해 보였다. ‘신데렐라’라는 건 상상 속에서나 있는 등장인물인데 말이다.
‘아니다. 아니야. 현실에서는 없다고. 게다가 이것들은 배고픔에 찌들었고, 호박은 몹시 작은데다가 시들했잖아. 또 수인이는 신데렐라답지 않게 유리구두가 자주 벗겨졌고, 가끔씩 뒤뚱거리며 발이 아프다고 호소했는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지. 암, 당연하겠지. 교장이 말한 조변림 사건은 뭐지? 그것부터 풀어볼까? 지난 신문들을 열람해 볼까?’
내 머리가 복잡하게 얽혀가기만 했다. 수인이의 우울한 모습을 교장의 비밀스런 말들과 연결 짓는 것은 ‘엄청난 비약’이라는 것을 스스로도 쉽게 알 수 있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호기심에 섞인 근거 없는 흥분들을 가라앉히고 진정하려 했는데도, 이유가 뭐든 간에 나는 집착증 환자처럼 수인이의 마음을 괴롭힐 수 있는 일들을 대수롭게 지나칠 수 없었다. 설령 그녀에게 아무 일이 없다고 치자.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나의 이기적인 탐구 정신이 나를 더 이상 가만히 놔두지 않았다. 내 몸속에 꼭꼭 숨어 있던 열정이 깨어나기 시작했다.
‘동화에서나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를 증명할 방법은 없고……. 그러면 조변림 사건으로 처참하게 죽었다고 했지. 누가 죽었다는 말이지? 그때 쓰인 무기가 M16 소총쯤 되나? 또 그게 수인이 하고도 상관이 있는 걸까?’
난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학교도서관 B동의 신문잡지 열람실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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