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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Novel & BooK

[Social Fantasy13] 카나리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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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2

 

 초롱초롱한 옅은 하늘색 눈동자에 코가 유난히 뾰족한 로즌 선생님이 여느 때와 달리 첫 시간부터 골머리가 아픈 등차, 등비수열인가를 설명하고 있었다. 마치 하릴없는 귀족들의 난해한 숫자놀음에 불과해 보였다.

 게다가 수업 진도도 무지하게 빨라,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머릿속으로 이미 수학자들의 몸을 하나씩 펄펄 는 물에 담금질하고 있었고, 로즌 선생님도 절대 예외가 될 수 없었다. 한숨만 절로 나왔다.

 그나마 등차수열은 쉽게 따라갈 수 있었지만, 등비수열 계차수열의 설명을 연이어 들을 때는 외계언어 같아 내 머리가 도저히 따라가지 못했다. 아랫배조차 편치 않았다.

 로즌 선생님이 잘 가르치지 못해서라고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했다. 그녀는 일주일 정도 남짓한 결혼식을 준비하느라 교재 연구도 하지 않은 채, 흥분에 들뜬 목소리로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이렇게 내 자신을 위로한들 아무 소용없었다. 크게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쿠키 몇 조각만 먹고 아침밥도 거른 내 배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5분만 늦어도 며칠 전에 돈 아껴가며 샀던 값비싼 메이커 바지가 설사덩어리로 흠뻑 젖을 태세였다. 수업에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옆에 세진이는 내가 잠을 자지 않나 감시하듯 가끔 힐끗힐끗 쳐다보면서, 수업에 집중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앞에 찬수는 밤에 뭐했는지, 수업 시작한 지 2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입 쩍 벌리며 하품만 해대더니 벌써 그 친구 머리가 만유인력의 법칙을 못 견디고 책상 바닥에 맞붙고 말았다. 얼굴은 윤곽이 뚜렷하여 장군의 조각상까지 닮았는데 말이다.

 ‘, 미래도 꿈도 없는 녀석!’

 나는 수업에 도통 관심 없고 잠만 자는 친구들에게는 거침없이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교탁 앞에 서영이도 무녀라는 책이 오늘은 별 흥미를 못 느꼈는지 찬수처럼 졸린 눈으로 하품만 해댔다. 그런데 지금은 남일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다급하게 오른팔을 번쩍 들어 로즌 선생님에게 나의 위기를 설명하고, 확 달아나듯 교실 문을 걷어차다시피 열어 재끼고 화장실을 향해 질주했다.

 나의 허둥대는 소리에 놀라 어렵사리 깨어난 찬수는 어안이 벙벙했는지, 주변을 돌아봤다. 그러고는 별일 없어 보였는지 그 자리에 쓰러지듯 다시 잠속으로 천천히 빨려 들어가는 그의 모습이 저 멀리 교실 문 틈새로 보일락 말락 하다가 사라져갔다. 내 머리 뒤에서 들려왔던 반 아이들의 왁자지껄대는 소리도 점차 희미해져 갔다.

 우리 학교는 겉보기에 유럽의 박물관처럼 돌기둥까지 있을 정도로 고전미가 넘치고 화려하다. 하지만 화장실은 지저분하기로 유명하다. 배수 처리가 미미한 탓에 일을 다 본 후에도 아래에서 올라오는 고약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 나머지 토 나올 듯하고, 벽 사방엔 팔다리를 잃은 여인들의 나체가 우스꽝스럽게 그려져 있었다. 그래도 화장실이 지저분한 건 그나마 견딜만했다.

 가장 곤욕스러운 건, 화장실 가는 길이 어쩔 수 없이 외부 주요 인사들이 자주 들락거리는 교장실을 지나갈 수밖에 없다는 거다. 거기에서는 지금처럼 급한 와중에도 새색시 걸음으로 총총히 걸어가야만 하니, 여러 가지로 환장할 노릇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교장의 조용하고도 나지막한 목소리가 교장실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또렷이 들려오지는 않을 듯싶었다. 바지가 반갑지 않은 손님인 설사로 흠뻑 젖을 수 있어 교장의 말에 도저히 집중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운동장에는 반 대항 소프트볼 야구 시합과 풍물놀이로 흥을 돋우는 응원으로 떠들썩했다. 그럼에도 교장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흘러나왔고, 내 귀에 쩡쩡 울려댔다.

 “날개 얘기는 학생들한테 하지 말아주십쇼.”

 그가 정중하게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멀찌감치 들려 나왔다. 여러 소리들이 시끄럽게 뒤섞여 있었지만, 신기하게도 교장의 말만은 또렷이 들려온 것이다. 한스 선생님이 분명히 그 자리에 있었을 텐데, 그의 목소리는 좀처럼 들리지 않았다.

 나는 문득…… 우리 학교의 재정이 넉넉하다 보니, 체육관이나 강당에서 그의 부임을 성황리에 축하하려는 행사를 암암리에 계획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높이 올린 깃발, 어른 키만 한 촛대, 그리고 백파이프와 오르간 연주가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거기에 날개까지 등장한다는 말인가? 나의 호기심을 달래기라도 하듯이 교장의 말소리가 또 다시 교장실 문 틈새로 새어나왔다.

 “이런 말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조변림 사건 기억하오? 처참하게 죽지 않았소. 다시는 학생들에게 그런 얘기는 하지 말아주시오!”

 그제야 한스 선생님의 기어들어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하겠소.”

 마침내 그의 냉랭한 기운이 섞인 짤막한 대답이 흘러나온 것이다.

 ‘날개? 조변림? 말하기 꺼려했던 그 비밀의 숲 이름……. 조변림은 새가 사람처럼 큰 똥을 싼 게 수북이 쌓여있는 숲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게 바로 에메랄드 숲을 말하는 거였다!’

 주인이 주는 먹잇감을 기다리는 애완견처럼 두 귀를 쫑긋 세운 나는, 내 귀까지 의심했다. 이게 무슨 말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한스 선생님의 부임 축하 행사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건 확실해졌다.

 교장은 그의 대답이 왠지 석연치 않았는지, 당부하는 말로 바꿨다.

 “제발이요. 한스 선생님! 날개에 대한 그 두툼한 문서들도 불살라 버려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리고 신데렐라와 워싱턴정가 얘기가 아이들 입시에 아무 상관없지 않나요?”

 ‘날개 문서? 그건 또 뭐야. 워싱턴 정가? 정치 얘기 같은데, 또 웬 신데렐라 동화? , 너무 복잡해.’

 더 이상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내 뱃속에서 요란하게 요동치는 소리 덕분에, 내 자신도 모르게 화장실이 아닌 교장실 앞쪽에 멀찌감치 멈춰선 내 자신을 인식할 수가 있었다. 화장실로 허둥지둥 달려갔다. 화장실에 들어서자마자 입구 앞에 있는 첫 번째 문을 열어봤지만 굳게 닫혀 있었다. 심지어 다른 두 개의 문 바로 위로 잿빛 담배 연기가 모락모락 쉼 없이 올라오고 있었고, 남녀의 몸이 한데 뒤엉킨 것 같은 작은 신음소리도 들려왔다.

  아이, 이런 썩을 놈들 수업은 듣지 않고……

 잔뜩 얼굴을 찡그린 나는 맨 끝에 마지막 남은 화장실 문을 힘껏 열어 재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바지 허리띠를 풀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이미 내 몸 밖으로 누런 설사가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덩어리째 바지를 관통해서 내 다리 밑으로 흘러내려 오고 있는 게 아닌가. 고약한 냄새가 진동해 댔다.

 “으아아아아……!”

 나도 모르게 괴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교장과 한스 선생님의 비밀스러운 대화를 못 들은 척하기 위해서라도 내 입을 주먹으로 급히 틀어 막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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