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6
어쨌든, 지겨운 에머튼 선생님의 강의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잠을 깨려는 나의 강렬한 본능 탓인지, 몽롱한 기운이 사라지는 듯했다. 이미 나의 귀청을 울려 댄 말발굽 소리는 사라진 지 오래고, 아주 흐릿하게 들렸던 늙은 여인의 절규조차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마치 내가 사악한 영혼의 빙의라도 벗어난 것처럼, 내 어깨도 한결 가뿐해졌다. 그젠가 교회 목사님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빙의에 대해 설교한 게 기억났다. 그가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를 인용하면서, 신령이 몸 안으로 들어오는 ‘빙의’라는 걸 말할 때는 내 몸에 찬 얼음을 댄 것처럼 오싹했었다.
어느덧 이런 상념도 무색할 정도가 되어갔다. 교실 창문 밖에는 짙은 석양이 하얀 잇몸처럼 드러낸 콘크리트 벽을 가로질러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는 것이 내 눈에 확연히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그리 넓지 않은 파릇한 학교 잔디밭 운동장과 멀리 상티밸리 골짜기와 어우러져 보이는 고층 아파트 여럿이 훤히 내다보이는 교실 안. 이곳에는 석양에서 흩어지는 엷은 오렌지 빛이 감돌았다. 여느 때처럼 잠에서 덜 깬 얼굴을 한 학생들은 하루가 저물기 전에 얼른 영어로 빼곡한 너덜너덜한 책장을 접고, 밖으로 뛰어나갈 기세였다.
오늘 하루가 올 들어 가장 무더웠던 탓인지, 교실에는 퀴퀴한 땀 냄새가 진동했다. 유일한 생명선 같은 오렌지 빛마저도, 공부에 지쳐 잠에 취해 있는 어느 누구의 오감도 자극하지 못했다.
★
오늘 수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직감한 나는, 심연으로 빠져들었던 혼미한 정신을 더욱더 말끔히 챙기려고 노력했다. 내 왼쪽 옆에 세진이가 내 멍한 기운을 치유라도 해주려는 듯 집게손가락을 바짝 세워 내 어깨를 ‘톡톡’ 쳐 줬다. 그는 내가 수업에 집중 못하거나, 수업이 끝날 쯤 되면, 이렇게 신호를 주었다. 간혹 내가 아무 기척도 없기라도 하면, 사정없이 나의 웃옷자락을 잡아 끌어당기곤 했다. 그는 매사 성실한 나머지 나까지도 챙겨줬다. 뒤늦게 안 일이지만, 제주여행 때도 비행기 의자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쳐 실신한 나를 이리저리 잡아 흔들어 깨워줬던 것도 나의 어머니가 아니라 세진이었다고 들었다. 잘난 체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여러모로 쓸모 있는 인간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고,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수업의 종을 예감할 수 있었다.
“오, 기특한 녀석!”
나는 그에게 ‘고맙다’는 표현으로 이렇게 말해 주곤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되돌아온 말은, 나를 종종 ‘큭큭’ 웃게 만들었다.
“너, 죽을래?”
아마 내 칭찬이 민망해서일 거다.
그런데 이쯤 되면, 잠시 뒤에 어김없이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구레나룻이 자칭 멋지다는 영국계 한국인 에머튼 선생님이 작은 막대기로 교탁을 ‘탁탁’ 두들기는 소리, 그 소리를 연상할 수 있었다. 그는 평소에 가장 아끼는 보물이 애지중지하는 훈계용 뾰족 막대기와 버릇처럼 다듬는 구레나룻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다.
놀랍게도, 그와 중에 우연히 왼쪽 모퉁이가 살짝 깨진 교실 창문 틈새로 보이는 바깥은 평소와는 다른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처음엔 제주여행에서 환영으로 본 에메랄드빛 망토를 입은 여인인 줄 알았다. 다채로운 빛깔의 새들이 잔뜩 화원 주변의 곡물 창고와 운동장 위로 날아들고 있지 않은가. 간혹 사람처럼 크고, 드래곤처럼 험상궂은 새들도 눈에 띄었다.
‘꿈이 아니었나? 죽음 속에서 나를 감싼 그 새들이 우리 학교까지 온 건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창밖엔 짙은 석양만이 감돌았는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나는 갑자기 소름이 돋았다. 새들은 오렌지 빛 석양까지 가리며 빙빙 돌다가, 창문 틈새엔 두세 마리 새들이 앉아 요란하게 지저댔다. 도시 한복판에 자리 잡은 학교라기에는 기이한 일임에 틀림없었다.
가뜩이나 졸고 있는 학생들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에머튼 선생님은, 사정없이 사방으로 뻗쳐있는 그의 구레나룻을 다듬는 것도 잊은 채 발걸음을 창가로 옮겼다. 마치 새에게 화풀이할 것이라는 나의 짐작을 가능케 한 것처럼, 그는 막대기로 요란하게 지저대는 죄 없는 새의 머리를 인정사정없이 갈겨댔다. 그가 휘두른 막대기의 뾰족한 끝 부분이 여러 갈래로 부서져 나갔다.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를 쉽게 가늠할 정도였다.
나는 순간 “악”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는 내 비명도 무색할 정도로 거칠게 교탁을 두세 차례 두들겼다. 그리고 맥없이 졸고 있는 학생들을 향해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새 머리가 졸음을 못 이겨내는 학생들의 머리로 여겨졌나 보다. 나는 창가에서 공부하고 있다 보니 새 머리에서 피가 흘러나온 것을 다른 학생들보다 더 정확히 직감할 수 있었다. 나는 오늘 아침부터 피에 익숙한 터라, 그나마 격양된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 새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달리 어렸을 때부터 새를 사랑하다시피 한 나에게는 잠이 확 달아나는 섬뜩한 순간이었는데 말이다. 내 머리가 몹시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에머튼 선생님은 냉혈인간처럼 새의 죽음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녀석들, 여기 주목하라니깐! 학교에 남아 못다 한 공부를 정리하고, 일찍 집으로 돌아가서도 단어 암기와 문장 해석 공부에 게을리 하지 말고. 알았지!”
우리가 마치 철없는 어린 학생인 것처럼, 침 튀겨가며 신신당부했다. 그도 이런 말을 할 때가 하루 중 가장 짜증나는 순간일 수밖에 없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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