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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Novel & BooK

[Social Fantasy10] 카나리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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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

 

8

 

 시간은 스스로 끝을 향해 움직인다고 누군가 말했던 거 같다. 마침내 수업 마치는 소리가 교회 탑 종소리보다 더 요란하게 울려댔다.

 얼굴을 잔뜩 찌푸렸던 나는 에머튼 선생님에 대한 불편한 심기를 억지로 자제하려 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더욱더 언짢아져 갔다. 아버지에 대한 처참한 여러 기억들과 함께, 새가 땅바닥에 꼬꾸라져 피 흘리며 시름시름 앓고 있다는 생각으로 만감이 교차됐기 때문이다. 나는 수업이 끝났어도 뒤끝이 깨끗한 해방감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잠으로 일관하던 학생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웃음꽃을 피우며 한꺼번에 교실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어떻게 해서든지 앞다퉈 누가 먼저 교문 밖을 나가는 경주에 내기를 건 것처럼, 긴 생머리를 휘휘 날리며 체리 호두파이를 입안에 가득 넣고 뛰어가는 여학생 여럿이 눈에 띄었다. 애써 태연한 척하며 스스로를 감옥에 가두듯, 밤늦게까지 교실에 남아서 자습을 하는 졸업반 선배들과 그 밖의 몇몇 학생들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던 거다.

 심지어 같은 반 친구들, 특히 서영이와 알미안. 그들은 에머튼 선생님을 흉내 내듯, 교문 밖을 나서면서 작은 나뭇가지로 새들의 머리를 내갈기는 안타까운 모습까지도 쉽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던 걸음을 멈춰 서서, 빈정대면서 가증스러운 이들을 후려치고 싶었다. 아니 두들겨 패고 싶을 정도였다.

 ‘죽일 놈들! 코도 오뚝하고 예쁘장한 서영이는 알미안이 뭐가 좋다고 따라다닌담. 살생무기 팔아서 얼마나 잘 사나 두고 보자!’

 나도 모르게 내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팔까지 걷어 올렸다.

  그 더러운 물결 속에서도 멀리 시끌벅적한 복도 오른쪽 맨 끝에서부터 나에게 종종걸음으로 뛰어오는 녀석을 볼 수 있었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하게 나의 가방 틈새로 쪽지를 넣고, 별일 없듯이 멀리멀리 교문 밖을 나서는 나의 천수인

 그녀는 피 흘리는 새조차 잊게 만들 정도였다. 그녀를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새 내 손끝이 떨려왔고, 내 온몸의 힘이 빠지면서 흩어지다가, 내 몸 어디론가 몰려갔다. 어느 또래 여인보다 더 황홀했고, 어른스러운 저돌적인 욕망으로 다가왔다.

  기다림 외엔 그대는 나를 고통스럽게 한 적이 없다.

 뱀으로 가득 차서

 뒤얽혀 꼬여 있던

 저 시간들

 그때

 나의 영혼은 추락해가고 있었고 나는 질식해 가고 있었어

 그대는 걸어오고 있었지

 그대는 발가벗은 채 할퀸 자국으로 오고 있겠지

 ……

 나는 고통스럽지 않았나니, 내 사랑이여.

 나는 오로지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노라

 ……

  빠블로 네루다 시집 그대사랑 내 영혼 속에』〈그대는 오고 있었지에서

 

 언제나 기다려온 그녀의 조그만 쪽지…… 거기에는 늘 몇 글자 정도만 적혀있었지만, 그녀가 정성스레 꾹꾹 눌러 쓴 짙은 검정 볼펜 자국이 내 이목을 잡기에 충분했다.

  에메랄드 숲으로

이곳에도 사람이 살까.

  마치 불미스러운 마약 거래를 연상케 하는 만남 방식. 나와 수인이의 소극적인 성격 때문일까. 아니면 우리가 남들에게 드러낼 정도로 성숙함이 무르익지 못해서일까. 우리는 서로 핑곗거리를 약속한 것처럼, 아직은 어른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남을 위해선 남들의 시선을 의식해야 했다. 또 있다면, 만일에 학교 교과 성적이라도 떨어지는 날에는 주변의 노골적인 질타가 수인이에게 향할 게 뻔해서일 수도……. 수인이와 먼 지방이나 해외여행을 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였고, 당연히 어머니는 수인이가 나의 친구라는 것도 짐작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가람국제고는 생활의 여유가 있는 학생들이 많은데다가 남녀공학이라서, 연애담이 꽤 있을 듯싶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던 거다.

 다들 원하는 대학, 명문대학에 들어가기가 쉽지 않아 머릿속에만 애틋하게 있을 뿐이라는 데. 실제로 있기라도 하면, 주변에서 말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급기야 대학을 못 가면, 애꿎게도 주위에서는 남 탓 친구 탓하며 삿대질까지 하는 분위기니, 있어도 몰래 만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체육관 3층 욕실에서 리듬체조 여자 주장으로 있는 헤른이가 막 샤워를 마치고 벌거벗은 채 물을 가냘픈 몸 선을 따라 흘리며 나오는 모습을, 우연히 내 친구 성호가 본 적이 있었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여러 갈래 빛줄기가 조금씩 제 몸을 드러내는 듯했다는데. 그 순간 그는 그만 넋을 잃고 우두커니, 그녀를 바라만 봤단다. 그는 이 얘기가 눈덩처럼 부풀려 입소문으로 퍼져 나가자 크게 곤욕스러워했다. 하루가 악몽처럼 지나갔고, 불명예스러운 자퇴까지도 결심했었다. 다행히 둘 다 교내 봉사 정도의 징계에 그쳤고, 지금은 그때 둘의 영혼이 서로에게 스며들어 갔는지 우리처럼 비밀리에 만난다고 한다.

 마치 어둡고 캄캄한 벽으로 둘러싸여 있는 중세시대의 수도원 생활 같았다. 중세의 성직자 아벨라르와 수녀 엘로이즈의 아름답지만 금지된 사랑과 흡사해 보였다. 그래도 수인이가 나를 탓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앞서서 여기까지 왔다고나 할까.

 

 그녀가 쪽지에 적어 준 에메랄드 숲은 학교 근처에서 훤히 내다보이는 상티밸리 골짜기와는 불과 1~2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지금은 아무도 찾지 않아 풀이 길게 뻗쳐있는 킴란스 기자의 무덤과는 거의 붙어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여기서 저녁밥을 거뜬히 먹고 가족끼리 산책을 하기도 한다. 조금만 더 깊숙이 들어가면, 빽빽이 들어선 기술연구소 등의 고층 건물들로 둘러싸인 도시 모습이 어느덧 사라지는 마법의 공간이 등장한다.

 그곳은 인적이 드물고, 가끔 부끄러움 없이 은밀한 부위까지 내놓고 달리는 타조나 에뮤가 있다고 한다. 급기야 사람처럼 생긴 신비스러운 색깔의 새들이 날아다닌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건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괜한 장난이겠지…….

 사랑하는 연인들의 입맞춤 소리가 고요히 잠자는 다람쥐들을 깨우게 하는 깊은 숲 속이라고 이곳을 설명하는 게 나을 듯 싶다.

 원래 이 숲 이름은 에메랄드 숲이 아니다. 숲 이름을 말해 버리면, 너무 유치하고 촌스럽기조차 해서 대답에 대한 유혹을 멀리 던져 버리고 싶어진다. 말하고 나면, 고약한 냄새가 물씬 풍기는 명칭이라서 지금만큼이라도 진짜 숲 이름은 비밀로 부치련다.

 고등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는 어머니랑 몇몇 친한 친척들과 함께 이 숲에서 종종 물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산책을 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초저녁, 달이 숲 속을 환히 비추고 있을 때였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비가 한참 오다가 잠시 개이더니 어둠속에서 눈부실 정도의 에메랄드빛 블라우스를 입은 한 매력적인 소녀, 그녀가 내 앞을 지나가는 게 아닌가! 꿈속에나 가끔 등장하는 요정처럼 신비스러웠고 내 품에 가까이 있게 하고 싶었다. 제주비행 길에 비몽사몽간에 봤던 에메랄드빛의 망토를 입은 여인보다 훨씬 더 귀엽고 깜찍했던 건 분명했다.

 그녀는 내 앞을 서둘러 지나가면서, 오른발에 신은 구두 한 짝이 벗겨지고 말았다. 나는 엉겁결에 그 구두 한 짝을 종종걸음으로 주워 그녀에게 건네줬다. 그 구두는 맑고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고, 라임 빛을 냈다. 이것이 우리의 첫 만남이었던 거다.

 나중에 우연하게나마 알게 된 사실이지만, 당시 우리 학교의 같은 1학년 학생이었던 거다! 1여 년 동안 나의 스토커 같은 적극적인 구애로 지금은 누구보다 더 가까운 나의 친구가 됐다. 에메랄드빛의 블라우스 추억으로 이 숲 이름은 냄새나는 명칭을 쉽게 벗어 던지고 에메랄드 숲이 된 것이다.

 수인이는 친구가 된 지 불과 며칠 되지 않아서, 속속들이 털어놓은 말들이 있었다. 그녀는 특이하게도 아버지가 한국인이고, 어머니는 이탈리아 출신이라고 했다. 유럽과 아시아의 피가 그녀의 몸에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아버지도 나의 아버지처럼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그녀의 말에 서로 두 손을 움켜잡고 얼마나 울었는지 눈시울이 발갛게 부어오를 정도였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먼저 일찍 여의었다. 좀 지나 아버지마저 돌아가시면서 그가 라임 빛 유리 구두를 주며, 잘 간직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그리고 그녀의 이름은 원래 베르너스 천인데, 이국적인 이름 탓에 학교 친구의 놀림으로 언제부터인지 천수인으로 불리기 시작했단다. 나도 편하게 그녀를 수인이로 불렀다. 또 그녀는 수업을 마치면, 늘 해왔던 것처럼 학교 화장실 변기에 앉아서 교복을 에메랄드빛의 블라우스로 바꿔 입고, 이 숲에 와서 자유를 만끽했다나……. 블라우스 틈새로 살짝 비친 그녀의 속살은 무척 희어 보였고, 이따금 회색빛도 감돌았다. 에메랄드빛과는 사뭇 달라 보였다. 나는 그녀의 변신 덕분에 만날 운명을 갖게 된 걸까.

  그런데 오늘만큼은 수인이 보다는 피 흘리고 있을 새가 더 내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적은 거의 없던 것 같다. 새가 죽을지도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나의 우려스러울 정도의 광적인 새의 집착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다. 얼른 찾아서 늙은 마법사가 파는 약이라도 발라주고 싶었다. 새 몸통의 상처 부위를 샅샅이 찾아가면서 말이다. 나는 먼저 거칠고 가쁜 숨소리를 내쉬며, 다급히 에머튼 선생님의 막대기를 맞고 피 흘리고 있을 새를 창가 아래에서 이리저리 찾았다.

 하지만 시름시름 앓고 있을 법한 새는 아무리 찾아도 보이질 않았다. 유령처럼 사라졌다. 괴이한 일이 연이어 일어났다. 아마 장난 많은 반 친구들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새의 가느다랗고 연약한 한쪽 다리를 잡고 휙휙돌려 날려버렸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들의 이름들이 떠올랐다.

 젠장, 서영이와 알미안…….

 속이 즉시 메스꺼워졌다.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해야 할지…….

 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에 흘러내렸다. 이리저리 찾아도 결국 새는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씩씩한 웃음 따위는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나는…… 새 찾기를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내 앞에서 바람이 잔잔하게 깔리며 땅의 흙이 일더니, 구레나룻이 무성한 에머튼 선생님이 내 앞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는 날 어렵지 않게 발견하고는 정중하게 날 향해 머리를 숙이는 게 아닌가. 나에게 잘못한 일을 해서가 아니라, 날 마치 자신의 상관인양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이 일을 같은 반 친구들에게 말한다면, 믿을 이가 누가 있겠나, 싶었다. 아마도 그를 정신병원에 구급차로 긴급히 후송할 생각만 할 게 뻔했다.

 그러는 사이 시간은 정처 없이 흘러가고 있다는 게 쉽사리 느껴지기 시작했다.

 본능적으로 날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수인이가 떠올랐다.

 나는 그때서야 그녀가 있는 에메랄드 숲으로 부리나케 내달음쳤다. 오늘처럼 정신없이 서둘러 그녀를 향해 갈 때가 가끔 있었다. 유독 그 참에, 학교 가는 길로 두 블록쯤 지난 길모퉁이에서 날 멀찌감치 지켜보는 아이가 있었다. 섬뜩하거나 놀랄 정도는 아니었다. 그 아이 이름은 실비아였다. 종교적 색채가 짙어 보이는 이름이었다. 성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이름도 겨우 떠돌아다니는 말들을 주워들은 거였고, 성을 애써서 알아내고 싶을 정도로 그녀에게 좀처럼 관심이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니, 실비아가 우아해 보인 망토 입은 그녀와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쌍둥이일 리도 없겠지만 말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추측이겠지만.

  그런데 실비아가 날 흠모한다는 말들이 학교에 퍼져있었다. 이를 모르는 동급생들과 선생님은 거의 없었다. 간혹 실비아의 청초한 외모 때문에, 심지어 선생님들조차도 날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보낼 정도였다.

 감정이 메말라 있는 나로서는 처음엔 이런 것들을 알 턱이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깨달아 갔을 뿐이다. 지금은 그녀가 나에게 동급생 여자 친구가 생긴 것 정도는 알고 있는 듯했다.

 내가 수인이를 만나러 서둘러 뛰어갈 때마다, 멀리서 나를 보고 흐느껴 울고 있는 것도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었다. 창백한 얼굴로 실비아는 나에게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너의 곁에 있을 수 없는 거니?’

 나는 속이 뒤틀려왔다.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수인이 말고는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게 없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녀의 일방적인 사랑, 아니 집착이 결국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울 정도의 처참한 비화를 낳게 될 줄이야……. 만일 그게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이었다면, 또 그게 나의 삶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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