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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Novel & BooK

[Social Fantasy5] 카나리아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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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ary's Wake

 

이윤영 한국언론연구소 소장 Social Fantasy Novel2

 

 

2

'에메랄드 빛 여인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온아! 얼른 일어나렴.”

 잔뜩 찌푸렸던 내 눈이 활짝 열렸다. 어머니의 목소리 같았다. 숨 막히는 어두컴컴한 암실 밖으로 급하게 뛰쳐나온 듯했다.

 “일어나라니까!”

 이번엔 그녀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왔다. 그때서야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엄마, 나 살았어? 여긴 어디지?”

 “어디긴 어디야. 정신 좀 차려! 다시 비행기가 인천국제공항으로 되돌아가고 있어. 새들 때문에 죽을 뻔했다니까. 망할 놈의 새……. 하늘이 도왔어.”

 그녀의 목소리는 윽박지르듯 격양되어 있었다. 나는 영문도 모르는 채, 이리저리 목을 돌려가며 눈이 빨갛게 충혈될 정도로 두리번거렸다. 약간 찌그러진 유선형 모양의 비행기가 덜 깬 내 눈에 들어왔다.

 실성한 듯 한쪽 다리만 길게 뻗은 채, 엉거주춤 앉아 있는 내 또래 여자애들과 남자애들이 쉽게 목격됐다. 심지어 머리가 유난히 길어 보이는 한 여승무원의 흰 셔츠 어깨선 자락이 찢겨져 흰 가슴속 살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비행기에 탑승한 여러 승객들은 마치 지옥을 경험한 듯 진한 긴 한숨만을 내쉬고 있었다. 죽음을 가까스로 피한 안도의 한숨 같았다.

 그런데 내 오른쪽 옆에 같이 제주여행을 하려고 탑승한 깡마르고 제 잘난 맛에 사는 내 친구 세진이. 그는 조금 전과 별반 다르지 않게 졸려 하는 눈을 비벼 될 뿐, 허둥대지도 않았다. 단지 그는 아무 말 없이 날 한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만 봤고, 그의 손에 쥐고 있던 돌하르방의 그림이 있는 제주여행 가이드책이 기내 바닥에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이 친구는 나처럼 당황해 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아마도 그는 집이 넉넉하다 보니, 잦은 해외여행 경험 덕분일 듯싶었다. 하지만 나에겐 이 순간이 어찔했고, 뭐가 현실이고 꿈인지 분간조차 힘들었다.

 ‘현실이었을까? 날아다니는 화식조…… 고집통이 영감 마법사가 날도록 혹독하게 훈련이라도 시켰나? …… 단단한 말발굽 소리와 군중의 웅성거리는 소리는?’ 그리고 들릴 듯 말 듯한 늙은 여인의 절규…… 완전히 생판 모르는 망토 입은 한 여인…… 왕가의 골짜기…… 실뱀…… 이 모두가 나에 대해 알고 있거나, 뭔가 관련이 있는 것 같아…….’

 내 머릿속이 복잡한 퍼즐로 가득 차 버렸다.

 ‘그럴 리가…… , 갈색 구두는 또 뭐였지? 승무원이 빨려고 벗어 놓은 신발인가? , 냄새나게……

 나는 혼잣말로 서로 연관 없어 보이는 낱말들을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어느새 가랑비는 그쳤고, 비행기 창문 밖으로 맑게 갠 하늘 아래에 웅장하고 뱀처럼 긴 인천대교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저 멀리엔 겨울을 난 마로니에 나무가 새순을 피워내는 경쟁을 하듯 흐드러져 있었다. 큰 탈 없이 인천국제공항 활주로에 이륙한 지 40여 분만에 내렸다. 공항으로 되돌아온 여객기는 새들의 깃털과 피로 붉게 물들어 지저분하다 못해 불쌍하기 조차했다. 승객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저마다 바쁜 종종걸음으로 서둘러 공항을 빠져나갔다. 이때만큼은 세진이도 이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는 못내 아쉬워 공항 출구에서 머뭇거리는 나를 주차장에 세워놓은 HD605i 자동차에 억지로 떠밀듯이 태웠다. 어머니는 서둘러 차 열쇠로 시동을 걸더니, 80킬로미터의 제한속도도 어겨가며 좌우로 핸들을 꺾어 집으로 되돌아왔다. 조만간 집으로 교통 범칙금 고지서가 잔뜩 날아올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괜히 미안하게……. 네 친구 세진이는 인사도 않고 그냥 가버리고……. , 기분은 좀 괜찮아졌니?”

 어머니는 집으로 되돌아오면서 세진이와 내가 몹시 실망했다고 생각했는지, 걱정됐나 보다. 뾰로통한 나는 어머니가 묻는 말엔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모처럼……없는 돈도 써가며 몇 달 전부터 작정한 여행이었는데, 쥐꼬리 같은 운도 없다니…… 엄마는 나 걱정 말고 범칙금이나 걱정하셔!’

 나는 머릿속에서만 이렇게 대뇌었.

 우연히 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새들이 내 눈에 들어왔다.

 ‘우라질! 저놈의 새들 때문에. 모든 게 물 건너갔어. 하지만 새들이 뭔 죄가 있다고…….’

 나는 허탈했고, 의자 모서리에 부딪힌 머리까지 몹시 욱신거려 짜증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하지만 불만이 뒤섞인 나와 달리 어머니에게 예전과 달라진 점은 거의 없어 보였다. 단지 그녀의 목 언저리가 발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그녀는 그 부위가 몹시 가려운지 이따금 긴 손톱을 세워 긁어대는 것밖에는……. 그녀의 목만이 외롭게 꿈틀거리고 있다고나 할까.

 그래도 나에겐 죽음을 직면하면서 봤던 에메랄드빛의 여인은 너무 황홀했다. 그것만큼은 현실이길 내심 바랐다. 그러고는 쉼 없이 하루하루가 지나갔다. 기억하기도 싫은 시시하고도 지루한 봄 방학은 쏜살처럼 지나가고, 학교를 가는 날이 어김없이 찾아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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